‘나의 해방일지’, 우린 모두 스스로가 가둔 틀에 갇혀 살아간다

[엔터미디어=정덕현] “다 내가 건사하며 사는 줄 알았지. 집사람 떠나고 나서 알았어. 집사람이고 애들이고 다 날 건사하며 살았던 거야.” JTBC 토일드라마 <나의 해방일지>에서 염제호(천호진)는 집까지 찾아온 구씨(손석구)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들려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. 그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한 걸까. 그리고 이런 진술을 통해 이 드라마는 무얼 말하려는 걸까.

사실 <나의 해방일지> 13회에 염제호의 아내 곽혜숙(이경성)의 갑작스런 죽음은 충격적이다.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복선도 없었기 때문이다. 하지만 어느 날 밥을 안쳐놓고 잠시 방에 들어가 누운 채 그대로 저 세상으로 떠난 곽혜숙을 마주한 후, 그가 그날 했던 일들을 되돌려보면 그게 또 복선처럼 보이기도 한다.

그는 기정(이엘)이 만나고 있다는 태훈(이기우)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다며 그들이 만나는 식당까지 따라갔다.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흐뭇하게 바라봤다. 태훈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지 음식 값까지 다 지불하고 그냥 가려다 돌아와 괜스레 태훈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.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당미역 근처 시장에 들러 구씨가 떠난 날 미정(김지원)이 힘들어했던 이야기를 들었다. 카메라는 곽혜숙의 어딘지 무거워 보이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따라갔다. 그날의 그의 모습은 이 드라마가 지금껏 보여주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.

뜬금없이 곽혜숙의 죽음이 드라마에 등장한 것처럼 보였지만, 그의 죽음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14회에 채워졌다. 어떤 사람의 죽음이란 떠나는 순간이 아니라 떠난 후 남겨진 빈자리로 그려지기 마련이다. 드라마 내내 쉬지 않고 투덜대고 여기저기 참견하고 때론 남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때론 남편에게 할 말을 쏟아내기도 하는 곽혜숙의 존재감이 그가 사라지고 난 염씨네 집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.

정적과 침묵, 그리고 쓸쓸함이 그 공간에 가득 찼고, 삼남매는 펑펑 울거나 말문이 막히거나 뒤늦게 철이 드는 모습을 보였다. 염제호는 단 며칠 만에 팍삭 늙어버린 얼굴이 됐다. 삼남매는 아버지와 함께 애써 식사자리에 앉아 엄마가 고생한 이야기를 한다. 아버지가 빚보증 서줬던 고모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그래서 엄마가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한다. 마침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기라도 했듯 회사를 그만둔 창희(이민기)는 아버지의 싱크대 공장에서 일을 도우며 먹을 때가 되면 집에 와서 밥을 챙기며 엄마가 쉬지 않고 했을 그 일상들을 고스란히 경험한다.

그러고 보면 쓸쓸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곽혜숙은 그 힘겨웠던 일상으로부터 드디어 해방되었다고 볼 수 있다. 하루의 피곤이 몰아준 잠 속에서 고통 없이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떠나 저 편으로 날아갔다. 가슴 한 가득 기정이 만나는 번듯한 남자친구를 보며 가졌던 행복감을 갖고. 물론 보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아픈 미정과 창희가 가슴 한 켠에 이물감처럼 남겨졌을 테지만.

반면 염제호는 어떤가. 아내가 떠난 후 한동안 삼남매가 챙겼지만, 구씨가 찾아왔을 때 그의 모습은 추레하기 이를 데 없었다. 풍을 맞은 듯 한쪽 팔은 굳어 있었고 다리 한쪽을 굽힐 수 없어 걸을 땐 절고 앉을 땐 펴고 앉았다. 어떻게 된 일인지 그를 “여보”라 부르는 여자가 있었지만 염제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. 삼남매가 모두 떠난 그 집에서 그는 여전히 자기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. 늘 그래왔듯 누군가 건사해줘야 살아가는 비루한 인생, 갇혀있고 묶여진 삶에서 그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.

<나의 해방일지>는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 했는가를 따지기보다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시스템이 우리를 얽어매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를 관조적으로 들여다보는 드라마다. 삼남매 각자도 그렇고 염제호와 곽혜숙 부부도 또 구씨나 태훈, 현아(전혜진) 나아가 태훈의 누나이자 기정의 친구인 경선(정수영)이나 행복지원센터 소향기(이지혜) 팀장까지 모두 물신화된 욕망의 시스템 속에서 저마다의 감옥에 갇혀 살아간다.

호스트바를 운영하고 있는 구씨의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알코올로 꽉 찬 허망한 밑바닥 인생이나, 미정을 계약직이라며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불륜 상대 여성의 연락처 이름을 염미정이라 휴대폰에 저장해놓는 팀장이나 다를 바가 뭔가. 또 염제호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자신이 가장이라며 가족을 부양한답시고 사실은 숨도 못 쉬게 해왔고 모두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건사해온 게 오히려 가족들이었다는 걸 깨닫는 미몽에 갇혀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.

<나의 해방일지>는 그래서 저들 각자가 써나가는 해방의 기록이지만,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한번쯤 자신을 되돌아보고 써볼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. 저들이 그런 것처럼 어쩌면 우린 모두 스스로가 가둔 틀에 갇혀 살고 있고, 어느 날 문득 자기 주변에 있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난 후 홀로 남겨져서야 비로소 무엇이 중요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니.

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@entermedia.co.kr

[사진=JTBC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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